'살아가는 이야기*소소한 일상'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5.12.16 브라보. 내인생 by 늘푸르게
  2. 2014.08.21 연락처를 정리할 때가 왔다. by 늘푸르게
  3. 2013.06.10 동인천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by 늘푸르게
오랜시간 꿈꿔왔던 배우로서 첫 무대..
3일 동안 4번의 무대에 섰다.

준비하면서 많이 힘들었고 흔들렸고 스스로 믿지못해 포기하고 싶었지만..
결국 무대에 섰고 매번 한계를 느낀만큼 성장하고 나아갔다고 믿는다.

시도하기를 멈추지 않는 용감한 나에게..
결과를 떠나서 고생했다고 토닥토닥 해주고싶다. 그간의 땀과 노력에 대해 수고했고 잘 해주었다고 응원해주고싶다.

앞으로 내 인생이, 나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다. 지금처럼 넘어지고 휘청이더라도 다시 또 일어나 걸어가길 멈추지 않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면 괜찮다고, 힘내라고 쓰담쓰담해주고 싶다.

Bravo, 내 인생♥

"실수하면서 보낸 삶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보낸 삶보다 더 명예로울 뿐 아니라 더 유익하다."
- 조지 버나드 쇼 -

Posted by 늘푸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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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이나 페이스북 등 사람 사이의 소통 도구가 다변화 된 요즘, 스마트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부 용량만 차지한 채 처치곤란인 ‘그냥 아는 사람들’ 목록이 늘어날 때면 답답할 때가 있다. 나만의 고민이 아닌지 이 때문에 아예 카톡을 삭제했다는 어떤 이의 사연이 기사화되기도 한다. 나 역시 적지 않은 사회생활 통해 마주친 많은 인연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가는 연락처 속에 진짜와 가짜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고 ‘친구’와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편의상 일시적으로 연락처를 나눈 업무 관계, 서로 연락하지 않는 과거 직장동료, 그동안 한 번도 연락하지 않으면서도 막상 지우기도 애매하여 형식적으로 저장되어 있는 수많은 스쳐간 인연들의 목록을 정리하려는 데 문득 떠오른 기억 하나가 있다.

오지랖 넓고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성격이어서 만나자마자 친구하자 손 내미는 나란 사람은 비록 자주 연락하거나 만나지 못할 지라도 ‘절교’라는 건 인연이 없는 단어였다. 게다가 내가 먼저 끊어낼 일은 없을 줄 알았다.

사회초년생이던 시절, 여고 동창생 한 명과 어떤 계기로 절교를 한 기억이 있다. 절친이라고 말할 순 없으나 고교 졸업 후 각자 다른 대학에 진학하고 사회인이 될 때까지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는데 그 일을 계기로 친구 사이가 정리되어 버렸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그 일이 없었다면 아마도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왔으리라.

다툼의 원인은 기억이 잘 나지 않을 만큼 사소했다. 내게 그 친구와의 우정을 단숨에 무가치하게 느껴지게 만든 건 친구가 뱉은 한 마디 말 때문이었다. 서로 언성이 높아지고 감정이 격양되던 순간 찬물을 끼얹듯 친구가 외쳤다.

“우리 서로 웃으면서, 좋은 모습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물론 좋게, 잘 지내자는 말이지만 그 속에 담긴 의중에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막역하고 다정한 친구 사이에도 의견 대립과 다툼으로 인해 감정이 상할 수 있다. 그것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얘기다. 가능하면 싸움을 피하고 대화로 풀어나가는 게 현명하겠지만 생각과 느낌이 다른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갈등과 화해는 ‘비온 뒤 땅이 굳는 것’처럼 우정을 성장하게 하고 돈독하게 만드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생각한다. 갈등과 다툼 자체를 부정하고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친구의 말 속에 담긴 ‘서로 좋은 얼굴과 모습만 나누며 지내자’는 말은 어린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사람을 사귐에 있어 좋은 면, 밝은 면에 매력을 느끼고 가까이 두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나 서로의 부족한 부분까지도 수용하고 있는 그대로 온전히 함께 하는 것이 진정한 우정을 나누는 것이지 겉으로만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속빈강정 같은 형식적인 친구 관계를 말하는 그 친구가 이해되지 않았다.

친구 사이에 의견 차이가 말싸움으로 번지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그 친구와 언성을 높이며 싸워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랬다. 그 친구와는 그날의 다툼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이다. 서로 진심으로 속내까지 드러내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친구란 속 깊은 우정을 나누며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인생을 함께 나누고 살아갈 벗이고 동행이다. 그런데 단지 좋게만 지내자는 그 친구의 제안이 ‘우리의 우정은 딱 거기까지’라고 선을 긋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머리끝까지 화가 났고 내 우정은 거기서 끝이 났다. 그 이후, 만남이나 연락은 뜸해졌고 그렇게 그 친구는 내 인생에서 로그아웃됐다.

지금도 가끔 그 친구를 함께 아는 여고 동창생을 만나면 생각나기도 하고 얘기 중에 화제가 되기도 하지만 내겐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는 ‘아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그 때의 나와 그 친구도 20대 중반의 뭘 모르는 미숙한 풋내기였던 건 분명하다. 어쩌면 내가 기대했던, 불완전한 나까지 포함해 온전히 교감하길 원했던 관계에 응해주지 않는 친구에게 화가 났으리라.

누구나 좋아해주는 장점이나 밝은 면보다 약하고 어둡고 부정적인 모습까지 수용하고 존중해주길 바라는 마음. 이것이 인간의 가장 깊고 강한 욕망인 ‘사랑받고 싶은 욕구’의 핵심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밝고 어두운 양면을 가진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온전히 교감할 수 있는 관계를 열망한다. 그것이 타인과 함께 어울리며 사랑하고 보듬으며 때론 양보와 희생을 감수하면서 서로의 가치를 존중받고 확인하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만드는 목적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사회적 동물인 우리에게 그 소중한 대상이 단 한명이라도 존재한다면 우리 삶이 더 풍요롭고 완전해지지 않을까? 이제부터 ‘양보다 질’,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은 이름들이 눈에 띄는 복잡한 내 연락처를 정리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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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늘푸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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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은 오후라서 승객 모두가 지루하고 나른한 공기 속에 있었다. 문득 눈에 들어온 건너편 곤하게 잠든 세 모녀의 모습이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초등학교 2~3학년 즈음 돼 보이는 큰 딸아이와 의자 위로 작은 다리가 달랑거리는 작은 아이, 수마에도 불구하고 보호하듯 아이들을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는 엄마의 모습에 절로 가슴이 따뜻해져 왔다. 꼭 예전 우리같이 느껴졌다.

 명절 때가 되면 엄마와 나, 동생 셋이서 동인천 할머니 댁에 기차를 타고 가곤했었다. 우리가 살던 서울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 인천까지 가려면 꼬박 2~3시간 동안 기차 안에서 보내야했다. 자고 또 자도 눈을 뜨면 여전히 이동 중인 기차 안이어서 그 길이 얼마나 멀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몸살 날 만큼 머나먼 여정이 피곤해 도착할 즈음이면 저들처럼 곤히 잠들기 일쑤였다.

 서로에게 기대 머리를 맞댄 채 졸고 있는 모습이 그 때의 우리와 겹쳐져서일까? 코끝이 찡하도록 그리움이 넘실댔다. 그 땐 그렇게 그 길이 멀고 고단했기에 기억할 만한 것 따위, 힘든 기억뿐이라 여겼었다. 이제와 아련하고 그리운 추억으로 마음에 남았구나 싶다. 그리움이 짙어지자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병으로 일찍 남편을 잃은 뒤 자식밖에 모르던 엄마는, 한 남자를 만났고 그의 여자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한 세트같던 세 모녀의 유대감은 물에 젖은 종이처럼 쉽사리 찢어졌다. 서운함을 토로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영원할 것 같던 아늑한 울타리에서 등 떠밀려 쫓겨난 기분이었다. 어찌나 황망하고 억울하고 허전하던지 그 때의 상실감은 금새 배신감으로 변질됐다. 그 당시엔 시간이 지나도 쉽게 가시지 않을 상처라 생각했었다.

 시간의 속도를 따라주지 않는 더딘 회복력 때문일까? 이런 저런 사건들과 상처를 남긴 기억들로 빚어진 감정의 쩌꺼기들이 해결되지 못한 채 목에 걸린 가시마냥 따끔거린다. 여전히 상처는 덜 아물었고 진행형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현듯 그리운 걸까?

 멀어지는 거리감에 누가 먼저 나서지 못한 채 시간의 부피만큼 많은 것이 바뀌었다. 엄마의 주름이 늘고 어린 동생은 한 남자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나는 좀 철이 들었다. 그간 많은 일들로 우리 세 모녀를 둘러 싼 상황과 서로의 입장, 마음까지도 어느 것 하나 예전 그대로 인 것이 없어졌다. 그래서 일까? 엄마를 떠올리면 늘 서운함이 먼저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리움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지금처럼 과거 어느 날의 추억과 마주보게 될 때면 엄마와 보낸 친밀한 순간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강보에 쌓인 아이처럼 품에 안겨 맡았던 익숙한 엄마 냄새, 주변 공기까지 따듯해지는 포근함, 안심하고 잠들 수 있는 느긋한 감정이 뭉개구름처럼 피어오른다. 마른 가슴을 촉촉이 적셔온다. 엄마는 그렇게 세상과 나 사이,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울타리로 여겨지는가 보다.  해소되지 않은 야속함이 아무리 커도 원초적인 그리움보다 앞서지 못하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분주한 와중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세 모녀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아마도 그들 주변은 다른 공기 속에 유리된 듯 아늑하고 고요해보이기까지 하다. 나 역시 그들의 평화로운 오수처럼 나른한 추억 속에 잠겨있었다.

 그리운 그 때를 떠올리는 현재의 나는 조금 더 넉넉해졌다. 따사로운 오후 햇볕에 기지개 켜는 새끼 고양이처럼 넘치도록 무료하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졌다.

 입가에 미소를 담고 조심스레 휴대전화에 저장된 단축번호를 눌러본다. 곧 들려올 익숙한 목소리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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